법에는 통치하는 방식을 정한 헌법이 있고, 이익과 손해를 다투는 민법이 있고, 범죄자를 벌에 처하는 형법이 있다.
자본주의 '자'도 모르던 고대 초기 국가에서는 민법과 형법의 구분이 없었고,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가 걸리면 목이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가족이 노비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고대국가에서 '법'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고대국가에서 율령(법)의 존재는 국가 권력, 특히 왕의 권력이 매우 강했음을 직접적으로 표시하는 지표이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전략으로 조조의 간담이 서늘해지던 3세기에, 한반도의 백제 왕실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인이 되어 백제의 고이왕이 된다.
고이왕의 출생과 나이 즉위 과정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고이왕 때에 백제가 나라다운 나라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백제는 마한이라는 지역에 있던 여러 성읍국각(군장국가 연맹체) 중 하나였을 뿐 마한의 리더는 목지국이었다.
고이왕은 목지국이 가지고 있던 마한의 대표 자리를 흡수했다.
고이왕때 낙랑군이나 대방군(진번군이 있던 곳)을 공격하여 한군현과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고이왕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있었거나 세력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왕권의 세습은 형제세습이든 아들 세습이든 간에 확실히 안전한 세습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율령반포는 소수림왕 때이고, 신라의 율령반포는 법흥왕 때이다. 백제의 율령반포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지만 고이왕 때 통치에 관한 여러 법이 있었음은 기록으로 나와있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16관등제이다.
백제국 또한 부족 연맹체에서 시작해서 고대국가로 발전한 케이스이다. 조그만 성읍국가들의 대표들 중에 한 명이 왕으로 선출되던 시절이 오래되지 않았기에 왕권이 강했을리가 없다.
고이왕은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처럼 피를 흘리고 왕이 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고이왕계가 4대에 걸쳐 이어지다가 다른 세력으로 바뀌었는데 2번이나 암살에 의해 왕이 살해되었다. 이는 왕실 내부에 고이왕 세력에 대한 앙심을 품은 견제세력이나 비토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갑자기 고이왕이 권력을 잡으면서 생긴 귀족사회의 갈등이 두 번의 왕 시해라는 사건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를 흘리고 왕이 된 고이왕이 주변의 군장국가들을 흡수하면서 귀족들은 서열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이왕이 권력을 잡는데 적극적으로 동조한 세력과 소극적으로 인정한 세력이 전리품과 권력을 나누는 과정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을리가 없다.
그렇다고 중국의 관료제의 준하는 16관등 6좌평이 고이왕 때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제도의 완성은 후대 왕권이 약해졌을 때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6좌평 때문이다.
백제는 관등을 5개씩 3부류로 나누어 관복의 색을 달리했다. 가장 높은 5개 등급은 자주색으로, 다음 5등급은 붉은 색으로, 가장 낮은 5개 등급은 푸른색으로 관복을 입게 했다. 그러면 15관등인데 16관등인 이유는 가장 High인 좌평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좌평+15관등= 16관등제
좌평은 15등급과는 격이 다른 완전히 다른 신분이었다. 하는 일은 고려의 도병마사나 조선의 비변사와 같이 병마를 담당하는 일이다.
고대 국가에서 병마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자리는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의 몫이다. 군림하는 왕의 오른팔 아니라면 왕이 직접 해야할만큼 권력의 열쇠인 업무가 병마를 책임지는 일이다.
고이왕이 집권하던 때는 귀족의 서열화가 시작되던 시절이었으므로 좌평은 기껏해야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좌평은 1명이고, 귀족들을 서열화시키고 일을 하도록 했다는 측면에서 고이왕 때에 백제가 왕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제는 후에 수도를 위례(하남)에서 웅진으로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면서 왕권이 약해지는 왕조였다. 물론 중간에 왕권이 반등하는 시점도 있지만 왕권이 가장 강했던 때는 위례 백제였고, 귀족의 힘이 가장 강했던 때는 사비 백제였다.
6좌평, 즉 최고 권력자가 6명이라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병마에 관한 의사결정이 6명의 합의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6명의 좌평이 의기투합하여 더욱 왕을 보필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좌평이 1명인 것은 왕권이 강한 것이 맞지만 좌평이 6명인 것은 왕의 힘이 많이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고이왕 때에 6좌평 16관등을 실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웅진이나 사비 시대에 6좌평 16관등으로 정리가 되었고 이런 구도를 시작한 고이왕 때로 소급하여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 사회가 서열화되어 관료사회로 되어가는 과정에서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감정이나 자존심에 의해서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정보와 전략에 따라 군사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고이왕 때에 백제가 마한지역의 대표로 떠오를 수 있엇던 것은 목지국의 헛발질도 있었겠지만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움직이거나 정치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 조조의 후손들을 폐위시키고 쿠테타로 진을 건국한 사마씨들의 권력다툼으로 망해가고 있던 때였는데, 이 때를 틈타 낙랑군이나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등한 위치까지 올랐다는 것은 정세를 보는 안목과 전략적 타이밍이 적절하게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한 사람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정보수집과 의사 결정 사이에 합리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팀이 있었다고 본다면 고이왕의 귀족사회 정비와 관료화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왕권을 위협하는 귀족들은 억울해도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한편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 쟁탈전 사회가 되면 쪽팔려도 왕은 수모를 겪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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