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포스팅(고주몽의 아들 해유리가 황조가를 부르다)에서 설명한 바와 주몽이 제 5부족으로 시작해서 왕실을 차지하기 전까지 졸본부여(고구려의 전신)는 소노부(비류나부)가 4부족 연맹체의 대표였다.
비류나부가 비록 권력에서 밀려나긴 했어도 그 일부(온조)가 한강 유역으로 내려가서 건실한 나라(백제)를 세울만큼 소노부는 비류강을 중심으로 한 저력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비류나부는 고구려의 왕권이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줄을 잘못서는 바람에 귀족서열에서 한참 밀리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한편 고구려와 같이 약탈 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에서 연맹체의 리더 자리는 대단한 이권을 지닐 수 밖에 없고 모든 부족은 연맹체의 대표자리를 원하는 경쟁구조를 피할 수 없다.
다행히 대무신왕때부터 꾸준한 정복활동이 이루어져 왕권은 조금씩이나마 강해지고 중앙집권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부인 세력이 주도하여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반동이 있었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오히려 왕권이 강화되는 사건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서 연이어 일어났다.
연나부는 고구려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으로 왕을 배출하는 개루부와 함께 일종의 연합 정권을 이루고 있었다.
이 연나부 출신의 한 여인이 고구려가 국가의 기틀을 다져가는 시기에 의미심장한 족적을 남겼다. 그만큼 고구려 사회는 개방사회였고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백제의 고이왕이 백제를 나라답게 정돈하기 수십 년 전인 2세기 후반에 고구려에서는,
연나부 출신의 왕비 우씨를 믿고 까부는 시대착오적 연나부 꼴통들이 있었다. 당시의 왕은 고구려 왕들 중에서 체격이 가장 우람했다는 고국천왕(고국천이라는 시내 옆에 무덤이 있는 왕)이었다.
국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쳐들어왔을 때 직접 퇴치한 바 있는 고국천왕에게 그들은 반란의 깜도 안되는 애들이었기에 바로 제거되고 연나부의 힘은 크게 약해졌다.
고국천왕은 왕의 위엄을 연이어 보여주고 나서는 귀족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릴 놀라운 정책을 실시한다.
바로 진대법이라는 구휼제도인데 식량이 부족한 봄에 왕실이 양식을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갚게 하는 복지 정책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귀족의 노비가 스스로 되었던 농민들을 왕실의 기반으로 끌어들이는 훌륭한 계책이었다.
당시 국상(총리)였던 을파소의 건의인지 고국천왕의 아이디어인지는 기록에 없지만 을파소의 전직이 농민이었음을 감안하면 을파소의 조언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왕실에서 나서 자란 고국천왕은 춘궁기의 어려움과 이를 이용한 민생의 파탄을 알기 힘들다. 을파소가 아이디어를 냈건, 을파소의 조언을 듣고 고국천왕이 계책을 세웠건 간에 귀족들의 불만은 상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족들이 을파소를 엄청 미워함. 하지만 고국천왕이 을파소 말을 안들으면 죽이삔다고 위협함)
고국천왕의 피지컬 능력이 강력한 왕권의 기반이다보니 고국천왕의 죽음은 왕권의 약화 그 자체를 의미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왕비 우씨를 통해 후사가 없었으므로 강력했던 왕의 힘은 급격하게 사라졌다.
자신의 부족인 연나부가 까불다가 찌그러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왕비 우씨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왕의 죽음을 숨기고 바로 시동생 고발기를 찾아가 딜을 제안했다. (왕이 되게 해줄테니 연나부의 위상을 다시 올려달라는 제안이 확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고발기가 애도 못낳고 왕권을 위협하는 연나부 여인의 제안을 받을 턱이 없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밤중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왕후 우씨는 포기하지 않고 둘째 시동생에게 찾아가서 역시 딜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철지난 고구려의 풍습(형사취수제)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형수의 육탄전에 매혹되었는지 아니면 권력욕에 취했는지 둘째 시동생은 이를 받아들이고 형수와 짜고 고국천왕의 유언을 조작했다.
형수의 무대포식 돌진과 동생의 야욕을 뒤늦게 알게 된 고발기는 국내성을 에워싸고 사건의 진상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성안의 여론은 고발기가 의도한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반란의 주모자로 내몰렸다.
결국 형수와 동생의 연합세력에게 왕위를 빼앗긴 고발기는 요동 태수(공손씨 가문)에게 몸을 의탁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수년이 지나 고발기는 중국인에게 열심히 비벼대어 군사 3만을 빌리고, 오래전 부터 왕실(개루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제 2 부족 소노부(비류나부)와 연합하여 왕위를 찾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고발기의 난)
고발기의 엎어치기는 처참한 패배로 좌절되었다. 고발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왕후 우씨와 동생 고연우는 결혼을 통해 연합 정권을 공식화 했다. 5부족 연맹체는 실질적으로 와해되었고 다시 개루부와 연나부가 고구려의 왕실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국천왕이 강력한 피지컬로 이룬 왕권은 다시 여자의 치마폭으로 쪼그라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씨는 애를 못낳는 여자였다.
그것은 결정적이었다!
형수와 힘을 합쳐 권력을 잡고 결혼까지 한 고연우(산상왕)는 우씨에게서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또다른 세력 관나부(관노부)의 여인과 통정하여 새로운 연합을 꾀했다.
어렵게 얻은 권력을 쉽게 내줄 수 없던 우씨는 산상왕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없애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결국 무위로 그치고 강력한 사내(동천왕)가 태어나는 것을 봐야만 했다.
산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된 동천왕이 대비마마 우씨를 좋게 볼리 없다. 산상왕 옆에 묻힌 우씨 무덤 근처에 나무를 심어 선긋기를 분명히 하고 5부족을 5부(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개편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부족 연맹체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로써 건국 당시부터 독자 세력화하여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왕권에 대립하기도 했던 5부는 왕비를 2번이나 역임한 우씨의 가상한(?) 노력에 의해 근거지를 잃고 수도에 묶여 중앙 귀족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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