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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을 위한 역사상식

광개토대왕과 프로게이머 임요환

개토대왕의 이력을 들추어보면 실패, 퇴각, 패배 뭐 이런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궤멸, 함락, 정복, 복속 이런 단어들만 나온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왕 한명이 용맹하다고 이렇게까지 국가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병서에 능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꿰뚫는 무당급 모사인 제갈공명의 지략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승리할 수는 없다. 제갈공명도 물리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삼국지연의의 제갈공명이 보여준 신기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추앙에 가까운 극화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항우도 광개토대왕처럼 한 국가의 승률을 이렇게까지 늘리지는 못했다. 자세한 기록이 없을 뿐이지 승률만 따지면 거의 이순신급이다. 인상적인 것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 시대에도 고구려의 전투력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그 이후로 고구려의 전투력은 특이점 없이 주변 국가들과 평준화의 길을 걷게 된다.

담덕 광개토대왕이 고구려를 지휘하면서부터 고구려에는 뚜렷한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흐름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100년 가까이 고구려를 동북 아시아에서 아주 특별한 국가로 만들었고 고구려가 가졌던 특별함은 후에 일반화되었기에 고구려가 특별하지 않은 국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정세로 이러한 흐름을 해석하기도 하지만 광개토대왕 때 갑자기 고구려가 강해진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광개토대왕과 비슷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인물이 있다. 십여년 전에 스타크래프트 전성시대를 열은 프로게이머 임요한이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트크래프트는 프로토스라는 외계 종족과 저그라는 괴생명체 종족, 그리고 인간에 해당하는 테란 종족이 각자의 특성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대단한 게임이다.

나타나기 전까지 프로토스와 저그 중심의 스타크래프트 판도는 종족간의 밸런스 불균형에 대해 말이 많았다. 인간 종족인 테란이 유독 약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테란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휘하는 임요환이 나타나면서 스타크래프트는 또 다시 종족간 불균형에 빠졌다.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던 테란 종족이 가장 강력한 종족이 된 것이다.

당시 임요환이 보여준 기술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1초를 쪼개면서까지 유닛을 움직이는 미세한 컨트롤, 시간차 공격, 게다가 물량전을 위해 자원 확보를 어느 시점에 늘려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 등, 스타크래프트 세상에서 완전한 신세계를 열은 장본인이 임요환이다. 경쟁자가 없었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파죽지세 그 자체였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임요환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임요환이 보여준 놀라운 퍼포먼스들을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할 수 있게 되었고, 임요환의 예리한 공격을 무력화시킬수 있는 대규모 물량전투를 위한 방법론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게이머들의 평균적인 실력 상승이 임요환을 시작으로 이루어졌고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임요환은 평범한 게이머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거란에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 500명을 다시 구해오는 일이었다. 억압과 강제로 백성을 다스리던 당시의 풍토를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강자는 권력자가 되고, 약자는 백성이 되던 시대에 백성을 아끼고, 목숨 걸고 구해오는 군주가 나타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군사의 사기는 현대국가의 무기의 첨단화와 맞먹는 고급 아이템이다. 지휘관의 일갈이나 전리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려진 군대의 사기가 아닌,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국가는 내가 지킨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군대의 사기이다. 이러한 고구려군의 정신적인 강인함은 장수왕 시절까지 꺼지지 않을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이것을 광개토 대왕은 첫 전투에서 얻었다. 백성이 환호하는 군주 앞에서 귀족들은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 왕권은 미친듯이 강해진다.

광개토대왕은 개별 전투에서도 놀랴운 전술을 보여줄 수 있는 지략가이기도 했다. 백제를 공략할 때, 전선은 임진강에서 펼치고 수군을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펼쳐 백제의 수도를 말 그대로 발라버렸다. 임요환의 드랍쉽 운용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갈 것이다. 무주공산 본진에 떨어진 병력들은 말 그대로 학살을 하고 다닌다. 어택하는 쪽은 이보다 짜릿할 수 없으며, 당하는 쪽은 이처럼 뼈아픈 것이 없다.

광개토대왕은 계산에 능한 왕이었다. 한강의 젓줄을 쥐고 있는 천혜의 요새 관미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기간이나 군대의 규모를 정확히 알았다. 그 이상 걸리지도 않았고, 그 이상 투입하지도 않았다. 즉 용병에 능한 전략가였던 셈이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은 머리수로만 우던 고대의 전투에서 전략과 날씨, 지형 등을 이용하는 고급 기술들이 선보이는 지휘관이었고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치 행위도 능한 군주였다.

스타크래프트의 임요환의 등장 이상으로 파괴적이었던 전략가 광개토대왕의 등장은 동북 아시아의 정세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5세기 동북아시아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 장수왕의 시대였다. 광개토대왕에게 털리는 주변국가들은 당연히 그의 전략과 신개념의 전투방식을 연구했고 따라했다. 그리고 주변 국가 모두가 담덕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따라할 수 있을 때 고구려는 평범한 국가가 되었다.